2009년 11월 21일
융, 인간의 심리학적 유형-(4)
7. 외향적 직관형
이 형은 외향적 감각형처럼 외적 상황에 강하게 의존하지만 감각형하고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. 이 형은 현실의 감각적 가치가 아니라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에 의미를 둡니다. 말하자면 싹트는 것 또는 미래가 약속된 것의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것입니다. 그래서 유지되고 있으며 안정되고 고정된 여건에선 ‘직관’이란 것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다닙니다. 보수적인 상황과 여건 속에서 이 유형은 질식하고 고사될 수 있습니다.
이들은 굉장히 냉정하여 어떤 가능성을 보인 것이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거나 더 이상의 발전이 예감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그것을 내버리고 떠납니다. 그러나 어떤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이 유형은 그것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. 그러나 더 크고 새로운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면 이전의 것이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고 명확한데도 그것을 감옥으로 여기고 숨막혀 하며 그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나버립니다. 이성도 감정도 그를 말리거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게 하지 못합니다.
사고와 감정은 직관의 뒤를 따릅니다. 이것들이 충분히 발달해 있다면 직관에 판단력을 주어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.
여성의 경우(융의 시대로 생각해볼 때), 자신의 모든 사회적 가능성을 동원해 어떤 가능성을 가진 남성을 찾아낼 줄 알지만, 이 역시 더욱 커다란 가능성을 지닌 남성이 나타나면 이전의 남성에게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고 그 즉시 떠나버립니다.
이 유형의 또 다른 특징으로 - 이기적인 성향이 두드러지지 않을 때 - 사람을 복돋우는 경향이 있습니다. 그가 어떤 조직에 있다면, 주위 사람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직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, 용기를 주거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에서 그를 따라갈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. 하지만 그 자신은 결국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나버립니다. 그렇게 자신이 이루어내는 상황은 결국 자신의 숨통을 조이기 때문이지요.
이 때문에 그 자신은 너무 쉽게 자신의 삶을 이 일 저 일에 허비해버립니다. 주변을 복돋우지만 그 자신에겐 결국 남는 게 없게 되는 것입니다. 금방 씨를 뿌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좇기 때문에 그 씨를 뿌린 결실은 다른 사람이 거두게 됩니다.
이들을 억압은 현실 감각입니다. 현실감각은 자신을 유지하게 하고 지키게 하지만 이들은 늘 그것은 제쳐두고 자신 외부의 새로운 가능성을 좇기에 그러합니다. 이런 억압이 분출되면 그 자신의 직관이 흐트러지고, 억압된 무의식은 이 유형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성에게 집착하거나 일종의 강박적인 상태로 의식을 몰아가면서 보상받습니다.
직관 이외의 다른 감정은 직관을 따라가는 열등한 기능이고 그래서 이 기능들이 분출되는 형태 또한 열등하기에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.
세미나 중간에 강한백조님께서 ‘히딩크’가 그런 인물이지 않은가, 하고 말씀하셨는데, 사실 제가 히딩크를 한 번 본 적도 없고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를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드러난 상황만 놓고 볼 때, 최소한 일에 있어선 자신의 직관에 사고와 감정이 적절하게 발전하여 보조를 맞춰주는 긍정적인 형태이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.
8. 내향적 직관형
이들은 신비한 몽상가 겸 예언자 그리고 환상가 겸 예술가(야콥 뵈메, 알렉스 그레이 등)입니다.
이 유형은 그 자신의 내면이 ‘직관’을 감지하려는 성향 자체에 집중하려 합니다.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관의 ‘감지’이고, 만약 예술가라면 감지한 것을 형상화하고 표현합니다.
순수한 내향적 직관형의 경우 직관으로 감지하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지만, 여기에 일종의 도덕이나 이념이 끼어들 경우 자신의 환상에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. 즉, ‘이 비전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? 이 비전이 나 또는 세계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?’
어쨌거나 이 유형이 보는 비전은 기본적으로 환상입니다. 그러므로 실제 주체의 삶이 될 수는 없다는 인식을 그 스스로도 -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- 가지게 됩니다. 그래서 오히려 이 비전을 실제의 삶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가지게 됩니다.
이것은 오직 그 스스로의 내면과 행위에서만 그러합니다. 그래서 내적으로는 비전과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지만 외적인 현실엔 전혀 적응하지 못합니다. 그는 자신의 삶과 비전을 말하지만 너무나 주관적인 표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. 그래서 융은 이 유형을 ‘황야에서 외치는 목소리’라고 표현합니다.
이들은 객체가 직접적으로 주는 감각을 가장 많이 억압합니다. 그래서 이런 억압이 분출될 때, 그 스스로의 내적 비전으로 의식이 완전히 승화되는 것을 막습니다. 오직 자신의 직관이 감지하는 비전으로만 승화되려는 의식의 태도를 차단해버리는 것입니다. 그래서 외향적 감각형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지만, 이 유형은 그들의 태도만큼 ‘능숙하고 완만하지’ 못합니다.
이들은 자신의 외부, 즉 객체들이 자신에게 주는 것을 너무 억압합니다. 그래서 억압된 무의식은 이 유형이 현실에 객체에 구속되도록 - 의식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므로 고통을 받는 형태로 - 만들어버림으로써 보상받습니다.
마치면서
이로써 간략하게나마 융이 설한 인간의 심리학적 유형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풀어보았습니다. 이는 저 개인의 해석이며,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이 책을 읽고 이해를 가지는 것입니다. 더 좋은 것은 이 책이 누가 읽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만 그것보단 스스로 이해를 가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.
어쨌거나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 유형들을 다양한 직업에 대입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. 척 보기에 예술가 타입은 아무래도 4, 5, 6, 8번 정도일 것입니다. 하지만 1번인 외향적 사고형이 예술가라고 가정해본다면 어떨까요? 이 사람은 스스로의 예술적 성취는 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분야에 체계를 세우고 역사를 정립하고 기법을 정리하는 등의 일에는 뛰어난 성취를 보일 것입니다.
또 다르게는 8번 내향적 직관형이 어떤 식으로든 과학을 전공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? 자신이 보는 비전이 과학과 일치함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고, 또 다르게는 과학은 이 드넓은 환상의 세계를 감지할 수 없는 미개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.
또한 내향적 사고형의 철학자가 외향적 사고형의 동업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? 내향적 사고형의 현실에 대한 무지를 감정이 충분히 발달한 외향적 사고형이 보완하면서 그 내향적 사고형이 자신의 사상을 충분히 퍼트릴 수 있도록 외적으로 정립시킬 수도 있을 것이고, 또는 반대로 이 어리숙한 내향적 사고형이 한없이 어리석게 보여 이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짓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.
물론 우리는 이게 아니라도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겠습니다만, 이 세미나로 인해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표현들을 가지는데, 그리고 어떤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.
감사합니다.
# by | 2009/11/21 01:03 | 소놀이야기 | 트랙백 | 덧글(0)




